“KAIST, 자학하지 마… 절대로”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지난해 전국 대학생 1000명을
설문조사했다. ‘당신 인생의 전성기는 몇 살 때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가장 많은 22.7%가 30세라고 답했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28세(10.7%)와 35세(9.6%). 80세 수명을 24시간이라 치면, 30세는 겨우 오전 9시다.
김 교수는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청춘은 20년, 30년 후 같이 먼 곳은 잘 보지 못하는 ‘근시’이고, 서둘러 꽃 피워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가 되려 한다고 썼다. 30세에 전성기를 맞으려니 조급하고
불안한 게 청춘이다.
흔들리는 청춘들과 부대끼는 대학교수로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본 인생 선배로서, 곧 대학생이 될 아들의 아빠로서 썼다는 이 책에서 그는 청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무 살에 이걸 하고 다음에 저걸 하고, 하는 식의 계획은 완전히 난센스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 대신 멋진 실수를 통해 배워라/ 대종상엔 있는데
아카데미영화제엔 없는 것? 신인상이다. 미국 영화계는 ‘신인’이 드물다. 아무리 처음 보는 배우라도 오랜 단역과 조연을 거쳤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첫 직장이 아니라 마지막 직장이다. 일찍 출세하지 말고, 크게 성공하라/ 데뷔하자마자
적금 드는 개그맨은 뜨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적금 부으려면 ‘행사’ 뛰고 부업해야 한다. 아이디어 짜내며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줄어든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쇄 자살 사건. 아프니까 청춘이지만, 그들은 뭐가 그리도 아팠을지. 요즘 청춘이 나약한 건지, 아니면 어른들 생각이 짧았던 건지. 한때 서남표식 개혁을 칭찬했던 우리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 13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 교육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 말은 (기사에) 그대로 써주면 고맙겠습니다(작심하고 말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대학의 모토가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이 돼버렸어요. 10년쯤 됐을 겁니다. 경제는 세계 11위인데 대학은 100위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였죠. 결국 대학의 세계 랭킹을 올리자는 얘긴데, 가장 손쉽고 가시적인 게 연구 실적이에요. 특히 이공계는 연구 실적의 양과 질이 랭킹을 좌우합니다. 카이스트나 서울대나 10년 동안 랭킹이 눈부시게 올랐어요. 하지만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는 자전거의 두
바퀴 같은 거예요. 연구에 방점을 찍으면서 교육 기능은 철저히 무시됐습니다. 대학이 학생 지도하는 교육기관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연구기관처럼 돼버린 겁니다.”
그는 ‘교육’이 무너진 대학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대학 다닐 때(그는 82학번이다), 교수와 학생이 굉장히 자주 만났어요. 학생이 데모하다 잡혀서 파출소에 있으면 지도교수가 꺼내오는 게 일상화돼 있었죠. 설날이면 학부생들이 자기 얼굴도 잘 기억 못할 교수님 댁 찾아가서 떡국 얻어먹고, 어느 집이 맛있다, 소문내곤 했어요. 고민 있으면 지도교수 찾아가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요즘 분위기, 한마디로 사제관계의 단절이죠.”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그대의 선생을 찾아가라’는 챕터가 있다.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대학 교수님이 연속 학사경고로 퇴학당한 학생과 면담한 얘기를 해줬다. 학사경고 받으면 지도교수와 면담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첫 경고 때 교수가 워낙 바쁘니까 과사무실에서 교수 목도장 찍어 면담한 것처럼 서류를 만들었단다. 두 번째 경고 때는 지도교수가 연구년이어서 국내에 없었다. 다른 교수가 대신 면담하지도 않았다. 결국 세 번째 경고로 퇴교가 확정되고서야 지도교수를 만난 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교수님과 오래 얘기한 건 대학 들어와 처음’이라고 말하더란다.”
-‘교육’ 상실의 문제가 카이스트에서 불거진 건 왜일까요?
“종합대학은 음대, 미대, 인문계, 다양한 학문영역이 모여 살아요. 교우관계도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편입니다. 카이스트는 교양학부가 있지만 공대 중심 대학이고 위치도 연구단지 안에 있어서 보고 느낄 대상이 한정돼 있어요. 같은
스트레스라도 학생들에게 훨씬 크게 작용했을 수 있죠. 전인교육에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그렇다고 서울대가 전인교육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경쟁 드라이브를 걸었던 겁니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분의 거취에 대해선 아무 의견이 없습니다. 서남표식 개혁이 계속돼야 하느냐, 완화돼야 하느냐, 그런 것도 아주 지엽적인 문제예요. 논의가 그렇게 흘러가선 안 됩니다. 제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건 카이스트나 서울대나 교육 기능을 보강하자는 것뿐입니다.”
경쟁
-요즘 학생들이 과거보다 나약해진 걸까요?
“그렇지 않아요. 청춘은 원래 가진 것 없고 연약한 영혼이 사회에 던져지는 시기입니다. 386세대는 대학시절 독재에 맞서 싸웠다, 요즘 학생들 왜 이리 허약하냐, 하는 사람 있을지 모르겠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386은, 저도 거기 속하지만, 어찌 보면 팔자 좋았던 세대입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 때는 대학생들 사이에 군부독재, 매판자본의 피해자란 동료의식이 있었어요. 거대악에 맞서 싸우는 동지들이었죠. 학교에서 친구와 경쟁한다는 생각? 그런 거 없었습니다. 스트레스도 동료와 손잡고 함께 받으면 견딜 만해요. 또 대학생 수가 적었고, 고속 경제성장에 일자리는 남아났죠. 고시 정도를 제외하면, 경쟁에 내몰릴 일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경제는 예전처럼 많은 기회를 주지 못하는데, 대학에 오는 사람은 너무 많아요. 함께 맞서 싸울 거대악도 사라져서 이젠 내가 살아남기 위해 친구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낙오하면 ‘내 능력이 부족해서’가 돼버렸어요. 예전처럼 ‘독재정권 탓’이라거나 ‘시절이 날 외면한다’는 얘기를 할 수 없게 됐고, 스트레스의 강도가 엄청 높아진 거죠. 요즘 제 친구들 만나면 ‘군부독재보다 신자유주의가 더 무서운 것 같다’고들 해요.”
그는 이런 세태가 반영돼 요즘 ‘오디션’ 열풍이 거세게 부는 거라고 했다. MBC ‘나는 가수다’ 얘기가 나왔다.
“여러 측면에서 놀라운 프로그램이에요. 대한민국 절창(絶唱)들을 모아놓고 하나씩 떨어뜨린다는 발상, 그래야 시청률이 올라가는 분위기, 누가 1등 할까보다 누가 떨어질까를 궁금해하는 모습, 사회가 독해진 거죠. 정엽이 탈락할 때, 김범수가 1등이었어요. 원래 이런 건 ‘두두두둥’ 드럼 소리로 긴장시키고선 ‘1등, 김범수!’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1등은 그냥
발표하고 지나갔어요. ‘두두두둥’ 하고 긴장 속에 호명된 건 꼴등, 정엽이에요.”
누가 떨어지나 보자, 하며 꼴등 발표에 주목하게 만드는 포맷이, 누가 낙오하나 보자, 하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학의 풍경과 닮았다는 것이다.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징벌적 등록금제. 이것도 결국 꼴등 가려내기다. 김 교수는 “대단히 비교육적인 제도”라고 했다.
“넉넉한 집 애들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가난한 집 애들은 알바 해야 합니다. 가난하면
학점 경쟁에 불리하고, 그래서 학점이 낮으면 돈을 내야 해요. 이건 부잣집 애들 등록금은 면제해주고, 가난한 애들에겐 돈 받는 역설입니다. 국비로 가르치는 카이스트 취지에서 너무 벗어난 겁니다.”
‘나는 가수다’ 제작진이 꼴등한 김건모에게 재도전 기회를 줬다가 프로그램이 좌초될 뻔한 상황.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게임의 룰입니다. 경쟁의 원칙이 흔들리는 것, 요즘 젊은 세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죠. 아무리 김건모라도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예전엔 ‘가족오락관’ 정도가 경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남자팀과 여자팀이 경쟁하면 무승부가 그렇게 많았어요. 만약 슈퍼스타K에서 허각과 존박이 무승부였다면? 난리 났겠죠.”
하지만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결코 경쟁 시스템을 배척하자는 게 아니다.
“교육은 가장 유연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학생들이 전부 다르니까요. 흑백논리는 안 됩니다. 경쟁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경쟁 없는 대학을 만들자? 말이 안 되는 거죠. 정답은 항상 양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있습니다. 경쟁을 시키되 ‘괜찮은’ 경쟁을 시켜야죠. 그러려면 경쟁의 잣대가 다양해야 합니다. ‘엄친아’가 아니어도 각자 잘하는 걸로 경쟁해서 돋보일 수 있도록. 암만 다른 거 잘해도
영어 못하면 게임이 안 되는, 그런 획일적 경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학이 뭘 해야 할까요?
“대학교육 바꿔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사회의 인재 채용 기준이 다원화돼야죠. 무작정 학벌 사회 없애자고 외치면 학벌이 없어지나요? 학벌 말고도 신뢰할 기준이 생겨서, 정부나 기업이 그렇게 인재를 뽑으면 대학은 자연히 거기에 맞춰야 할 테고, 그럼 중·고교 교육도 바뀌게 됩니다. 이걸
내신 몇% 반영하네,
수능은 몇%네, 하는 걸로 바꾸려니까 안 되는 거예요.”
조금 구겨졌다고 만원이 천원 되겠어?
김 교수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붙고 싶었다”는
행정고시에 세 번 낙방했다. 입대 영장이 나오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셔서 1년 만에 세 번 상주(喪主)를 하며 좌절했다.
그 경험을 ‘아프니까 청춘이다’ 96쪽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에 담았다. “포기가 항상 비겁한 것은 아니다. 불굴의 의지가 항상 통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벅차거든, 자신 있게 줄을 놓아라.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
내 인생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고시’라는 줄을 과감히 놓고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다른 공부를 시작했다. 우연히 맡았던 1시간짜리
강의에서 희열을 느껴 교수의 길을 택했다. 팔로어가 1만 명이 넘는 그의 트위터는 움직이는
상담실이다. 매월 100통 가까이 이메일도 날아든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고민을 속삭이고, 그는 일일이 들어준다.
이런 경험이 담긴 이 책 87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무리 독한 슬픔과 슬럼프 속에서라도 여전히 너는 너야. 조금 구겨졌다고 만원이 천원 되겠어? 자학하지 마.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